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샌디 코팩스 (문단 편집) === 1961~1966시즌 === 1961시즌을 앞두고서, 코팩스는 한 번 더 도전해보기로 결심했다.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훈련에 매진했고, 그 어떤 때보다 뛰어난 컨디션으로 시즌에 임했다고 한다. [[스프링캠프]] 기간 다저스 스카우트 케니 마이어스(Kenny Myers)의 지적을 통해 투구 동작을 개선하는 일이 있었고, 올랜도 소재의 B팀 연습 경기에서 제구 난조를 보였을 때, 조금 힘을 빼고 던져보라는 포수 놈 셔리(Norm Sherry)의 조언이 계기가 되어 투구 감각을 잡아내는 일도 있었다. 뭔가 다를 것만 같았던 그 시즌은 실제로 달랐다. 코팩스의 제구력은 장족의 발전을 이뤘고, 덕분에 본격적으로 선발진에 합류해 빼어난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시즌 동안 기록한 탈삼진은 무려 269개로, 이는 [[크리스티 매튜슨]]의 58년 된 내셔널 리그 기록 267개를 깨는 새로운 기록이었다. 1962시즌은 다저스가 타자 친화적인 로스앤젤레스 콜리세움을 떠나, 투수 친화적인 [[다저 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옮긴 첫 시즌이었다. 해당 시즌 코팩스는 지난해 달라진 모습에서 더욱 발전하여 타자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6월 30일 [[뉴욕 메츠]]를 상대로 데뷔 후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무서울 게 없던 코팩스였지만 부상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시즌 초 4월에 얼 프랜시스(Earl Francis)를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다가 공을 던지는 왼손에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당시 검지의 감각에 문제가 생겼지만 최초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좋은 기량을 가지게 된만큼 이를 중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그런 악재 속에서도 출장을 강행해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7월 중순이 되자 결국 부상은 왼손 전체로 퍼졌고, 도저히 공을 던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전문의에게 손바닥 동맥 부상을 진단받은 코팩스는 9월이 돼서야 다시 공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잘 던지긴 커녕 제대로 이닝을 소화하기도 버거운 모습을 보였고, 결국 다저스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추격을 허용하며 플레이오프 승부 끝에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 [[파일:Sandy Koufax pitching vs the Mets on route to no-hitter at Dodger Stadium on June 30, 1962.jpg|width=100%]] || || 1962년 6월 30일, 코팩스는 뉴욕 메츠를 상대로 통산 첫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 아쉬움이 남았던 시즌으로부터 이어지는 1963시즌, 그 해 메이저 리그는 스트라이크 존을 넓혔고, 이로 인해 본격적인 투고타저의 시대가 열렸다. 이런 환경에서 코팩스를 비롯한 메이저 리그의 에이스들은 이전보다 더욱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코팩스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동년 5월 11일엔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후안 마리샬]]을 내세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통산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만들어냈다. 거칠 것 없던 코팩스는 그 해 25승, 1.88ERA, 그리고 306탈삼진을 거두며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고, 생애 최초의 [[사이 영 상]]이자 역대 최초의 만장일치 사이 영 상을 차지했다. 내셔널 리그 [[MLB MVP]] 역시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해 코팩스의 활약은 페넌트레이스에서 그치지 않았다. [[월드 시리즈]]에서 [[화이티 포드]]를 앞세운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1차전에 등판해, 무려 15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2실점 완투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칼 어스킨(Carl Erskine)의 14탈삼진을 깨는 새로운 기록이었다. 당시 은퇴를 앞두고 있던 뉴욕 양키스의 불세출의 리더이자 명언제조기 [[요기 베라]]는, 처음 코팩스를 만났을 때는 "저런 애송이에게 25승을 헌납한 내셔널 리그 타자들은 모두 바보냐?"라고 코팩스를 무시하는 인터뷰를 했지만 1차전의 환상적인 투구를 상대하고 난 후 '''"코팩스가 어떻게 25승을 했는지는 알겠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는 건 대체 어떻게 5번을 진 거냐는 거다."'''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 경기를 포함 파죽의 3연승으로 시리즈 우승을 목전에 둔 다저스는 4차전에 다시 에이스 코팩스를 내보냈다. 그는 여기서 또 한 번 1실점 완투승으로 양키스를 압도했고, 다저스는 4연승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시리즈 MVP도 코팩스가 차지했다. || [[파일:Sandy Koufax pitching vs the Yankees in G1 of the 1963 WS on October 2, 1963.jpg|width=100%]] || || 1963년 10월 2일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투구 중인 샌디 코팩스. || 이 해 쿠팩스가 올린 성적은 40경기 311이닝 [[삼관왕/야구|트리플 크라운]], 역대최초 만장일치 사이영, 내셔널리그 MVP, 월드시리즈 MVP[* 이 때는 양대리그 1위만이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기에 DS와 CS가 없어서 월드시리즈 MVP가 포스트시즌에 받을 수 있는 타이틀의 전부였다.]로서 문자 그대로 투수로서 받아갈 수 있는 상을 모두 다 받아갔고, 코팩스는 본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이자 지금도 투수의 가장 완벽한 1년을 꼽으라면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전설적인 시즌. 1963년의 놀라운 활약으로 명실상부한 메이저 리그 최고 투수에 등극한 코팩스는 1964시즌에도 명성에 걸맞는 투구를 했다. 하지만 그건 부상과의 처절한 사투를 거쳐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 해 4월 22일 왼쪽 팔꿈치에 통증을 느낀 코팩스는 시즌 중 코티즌 주사를 세 번이나 맞으며 투구를 이어갔다. 그런 상황에서도 6월 4일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세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괴물 같은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19승을 거둔 등판의 다음날 아침, 왼팔을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지만 전날 경기의 결과는 13탈삼진 완봉승이었다. 하지만 활약은 거기까지였다. 팀닥터 로버트 컬랜(Robert Kerlan)은 코팩스에게 심각한 관절염을 진단했고, 에이스에게 제동이 걸린 다저스 역시 그 해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실패했다. 1965년 3월 31일 스프링캠프 경기를 소화한 코팩스는 그 다음날 아침 왼팔 전체가 검푸르게 된 것을 발견했다. 이에 팀닥터는 코팩스에게 로테이션을 꼬박꼬박 소화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고, 또 이대로 선수 생활을 강행한다면 일상 생활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장애를 갖게 될 거란 이야기를 했다. 코팩스는 경기 외의 불필요한 투구수를 최대한 줄였으며 온전히 경기를 소화하기 위해 시즌 내내 독한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필드 위에서는 부상을 참고 던지고 있단 걸 잊게 만들 정도로 완벽했다. 코팩스는 해당 시즌 동안 335 2/3이닝[* 이 기록이 얼마나 대기록이냐하면 19세기와 데드볼 시대를 제외한 1920년대 이후의 기록으로만 보면 다저스 역사에서 1년에 샌디 코팩스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록.]을 소화하며 또 한 번 팀을 페넌트레이스 우승으로 이끌었고,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두 번째 만장일치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9월 9일엔 메이저 리그 역사상 8번째 [[퍼펙트 게임(야구)|퍼펙트 게임]]이자 자신의 통산 네 번째 무안타 경기를 기록하는 위업을 이뤄냈다.[* 이때 상대투수였던 컵스의 헨들리는 "최고의 투수에게 패한 것은 불명예가 아니다." 라는 소감을 남겼다.] [* 이날 다저스는 단 1안타만을 치고 승리했다.] || [[파일:32345466548iht.jpg|width=100%]] || || [[1965년 월드 시리즈]]에서 투구하는 모습. || 그리고 그 해 월드 시리즈에선 경기 전부터 전국적인 화제의 중심이 되는 일이 있었다. 유대교의 속죄일([[욤 키푸르]])과 등판일이 겹친다는 이유로 1차전 등판을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개인의 신념과 사회적 지위가 충돌한 예로서 아직까지도 코팩스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일화로 남아있다. 훗날 코팩스 본인은 많은 이들에게 사회적인 메세지를 던질 의도는 없었고, 그저 존중에 관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어차피 당시 다저스에는 코팩스와 당대 최고를 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원투펀치를 구성한 [[돈 드라이스데일]]이 있던만큼, 코팩스가 2차전에 등판하는 것이 팀의 입장에서 아주 대수로운 일까진 아니었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편하게만 흘러가진 않았다. 1차전에 등판한 드라이스데일이 패퇴했고, 2차전에 나선 코팩스마저 6이닝 2실점 패전을 기록했다. 그러나 다저스는 초반 열세에 무너지지 않고 침착하게 반격에 나섰고, 코팩스는 5차전과 7차전에 등판해 두 경기 연속 완봉승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심지어 7차전은 이틀 휴식 후의 등판으로, 통증 탓에 커브볼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초반 이후엔 거의 패스트볼만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시리즈 MVP는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코팩스의 몫이었다. 이후 오프시즌 동안엔 연봉 협상에서 구단과 마찰이 빚는 일이 있었는데, 이 탓에 스프링캠프 합류가 다소 늦어졌다. 그러나 성적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323이닝을 소화하며 27승 9패를 거뒀고, 평균자책점에서 커리어하이인 1.73을 기록하며 자신의 세 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페넌트레이스 우승이 걸린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정규시즌 마지막 맞대결이 더블헤더로 치러졌는데, 그 두 번째 경기에 이틀 휴식하고 등판해 [[짐 버닝]]을 상대로 완투승을 기록했다. 당연하게도 해당 시즌 사이 영 상 또한 코팩스의 만장일치 수상이었다. 이어지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선 2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하지만 연이은 무리한 등판으로 인해 컨디션은 정상이 아니었고, 여기에 야수의 실책까지 겹치며 [[짐 파머]]의 완봉승을 지켜봐야 했다. 이날 경기에서 5차전 등판을 염두에 두고 6회까지만 던진 코팩스였지만, 그가 5차전에 등판하는 일은 없었다. 시리즈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다저스는 4연패로 우승에 실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